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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체제 | 장성맹주 · 혼두이트 · 은 나두히리닐드 | |||
문화 | 훔웨화카튼 · 화칸어 · 재민 · 거신신앙 | |||
역사 | 티카 · 가시발톱 섬 · 큰주머니 섬 · 목토인 · 목토어 | |||
남극해 무력시위 · 티펠라트리아 국가평의회 |
+ 남극해 무력시위 (남극해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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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_그림_설명}}} | ||
날짜 | ||
5011년 4월 11일 ~ 5066년 8월 1일[3] 5064년 6월 15일 ~ 5066년 8월 1일[4] | ||
장소 | ||
티펠라트리아 및 은 장성연맹 | ||
원인 | ||
은 장성연맹의 공격적 외교방식에 따른 생체병기통제계획 회원국들의 반발 | ||
교전국 | 한앙연합군 | 장성연맹합동군 |
한카 교회국 앙둔 제국 란카헤 연방 이렘나 철랑대 |
은 장성연맹 흉내이리 자소크 철학단[5] | |
지원 세력 | 디누단마 | |
상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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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공포의 새천년을 겪으면서, 특히 군사력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은 장성연맹이 티펠라트리아 인접 지역에서 일으킨 일련의 무력시위를 일컫는다.
발단
공포의 새천년 당시, 은 장성연맹이 있는 티카에서는 설원흉내이리가 출몰했다. 은 장성연맹은 본디 남극권에 있는 희대의 고립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다, 국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목소리를 낸 적도 없었기에 이번 사태에 대한 소식 역시 매우 뒤늦게 알려졌다. 무려 사태 발생 11년 후에야 알려졌으니 말 다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다른 출몰지와 비슷한 시간대 즉 5000년 1월 1일 00시 경에 설원흉내이리가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연맹을 구성하는 13부족을 일제히 공격했으며 괴멸적인 피해를 입히는데도 성공했지만, 은인들의 기이하리만치 완벽한 얼음장성 시공 기술을 이길 수는 없었다.
흉내이리들이 도시를 완전히 뒤엎은 뒤에 잠시 퇴각하면, 은인들은 밤새 바닷물을 길어와 이끼와 섞어서 다시 건물을 세워놓았다. 이 짓을 며칠 동안 반복하다보니, 오히려 지칠대로 지친 흉내이리 쪽에서 주춤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노린 은인들은, 얼음을 날카롭게 깎아 만든 날붙이를 들고 상어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오밤중 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흉내이리의 피부는 너무 질겼고, 빠르기도 바람 같아서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 ᨈᨚᨊᨍᨉᨛᨃᨙ !!
(개X끼들아!)”
하지만 흉내이리들은 과도한 에너지를 가진 은인들을 점점 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에는 으슥한 곳에 숨어 은인들 몰래 잠을 청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수였고, 결국 은인들이 밤새 지은 얼음 돔에 갇혀 옴싹달싹 못하는 신세가 된다. 흉내이리들은 굴복했고, 은 장성연맹은 이들을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국가의 경쟁력에 보탬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다.
전개
은의 등장
5011년 4월 11일, 은 장성연맹은 사상 최초로 티펠라트리아를 건너 타국에 도달했다. 그들은 얼음과 이끼로 만든 거대한 배[6]를 타고 티펠라트리아에 접한 인근 국가들에 나타났으며, 새롭게 편성한 흉내이리 부대를 필두로 수교 목적의 정상 회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국제기구인 생체병기통제계획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은 장성연맹이 수교를 요구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은 장성연맹과 같이 티펠라트리아에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해당 지역에 자치령을 두 곳[7]이나 가지고 있는 앙둔 제국은 일말의 언급조차 없어 의혹이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수교 요구 대상국 중 에스라스타 연방 왕국과 한카 교회국은 생체병기통제계획의 가입국이기에, 흉내이리를 동원해 온 은 장성연맹의 태도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보일 지에 대해서도 귀추가 주목되었다.
한카의 거절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한카 교회국이었으며, 은 장성연맹과의 수교를 거부하기로 발표하였다. 익명의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지난 몇 년 간 이어진 습격으로 아직까지도 골치를 썩이고 있는데, 수교하자면서 낭패 무리들을 끌고 오다니 우리나라를 조롱하는 것인가. 은 장성연맹이 습격의 배후가 아니라면 적절히 사과하고 다시 사절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스라스타의 거절
에스라스타 연방 왕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수교를 거부했다. 에스라스타 외무청장은 이토록 무례한 사절단은 처음이라면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은 장성연맹의 흉내이리에 관한 일방적 비판이 대부분이었고 은 장성연맹의 행동은 앞으로 티펠라트리아에 큰 반발을 일으킬 것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앙둔에서 떠도는 소문
카나는 앙둔 제국 관료들의 은밀한 대화를 입수하여, 녹취록을 단독 공개하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부터는 공개하지 않았는데, 녹취 장비의 문제로 감별이 어려웠다고 밝히긴 하였으나 미심쩍은 부분이다. 다만 카나에서는, 이들이 HNS의 가입국을 비밀리에 지원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하였다.
“ A: 그, 뭐고. 남극에 폐쇄국가 있다이가. 은 뭐시기 연맹인가 뭔가.
B: 아, 장성연맹 말하는교? 뭔 일 있답니꺼?
A: 아니 글쎄. 그 XX들이 수교를 원한답시고 흉내이리들을 데리고 와가 삽질을 벌였다카데.
B: 어디 가가꼬 그랬다는데예?
A: 뭐, 몰라.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한카랑 에스라스타는 확실하다.
B: 와, 암만 폐쇄국가라도 유도리가 있어야지. 감히 HNS 가입국에 쳐들어가노. 머리에 총 맞았는갑네예. 근데…… 저한테 와 이걸…?
A: 지금 검마들이 연속으로 두 나라에 퇴짜를 뭇다 아이가. 그러니까 열뻗쳤는갑지. 흉갑부서 일하는 지인이 그라데? 지들이 예상하기로는 무력 시위를 일으킬 것 같다고.
B: 지금까지 가만 있다 뭔 난린교? 가들도 가만본께 제정신이 아이네예.
A: 그래서 지금 니캉 내캉 이거를 대비하잔기지.
B: 뭘예? 설마…
”
디누단마의 도움
5015년, 한카에서는 무려 15년 간 습격을 이어나가고 있는 흉내이리의 완전한 퇴치를 위해 디누단마에서 신무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무기의 정체는 바로 "기관총"으로, 전통적인 궁병과 창병을 주로 다뤄 왔던 한카군의 장군들은 기관총의 엄청난 성능에 경악하였다.
5015 HNS 총회
자세한 내용은 5015 HNS 총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카와 디누단마는 각각 "은 장성연맹의 무력시위 제지"와 "이종족 언어체계 연구"에 관한 안건을 발의하였으나, "흉내이리 피습자 후유증 치료제 개발안"이 주요 현안으로 선정되면서 뒤로 밀려나고야 말았다.
한카의 충격적인 발견
5016년 4월 22일, 한카 교회국군이 은 장성연맹의 함선을 나포하는데 성공했다. 작년에야 겨우 디누단마의 신무기인 기관총을 도입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인 셈이었다. 하지만 해당 함선은 다름아닌 얼음전함이기에 가능했다는 의견도 힘을 얻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특수 소재를 활용하여 항해까지 가능하게끔 만들었다한들, 출정한지 어느덧 5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얼음의 내구도가 형편없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충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한카에서 나포한 함선의 추진 기관을 살펴본 결과, 지난 5000년 공포의 새천년 당시 실종되었던 앙둔 제국 아양2산단의 경비병력 및 기계부품이 마개조되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소식을 알게 된 앙둔 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은 장성연맹을 제재하는데 동참하였다.
은의 일보후퇴
그러나 5016년 말, 은 장성연맹은 돌연 무력시위를 중단하고 모든 전함을 뒷선으로 물린다. 앙둔 제국이 한카 교회국과의 연합군 자격으로 티펠라트리아에 대한 전력 배치를 계획하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은 장성연맹의 돌발 행동은 그 속내가 투명하다며 수많은 조롱을 받게 되었다.
이후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이후에도 은 장성연맹의 무력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상대국의 가시거리를 확보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되 시위 공간은 완전한 자기 영해 안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작은 섬이 많고 넓게 분포한 티카의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대륙 남부와 무진장 가까우면서도 엄연한 고유 영토 내인 곳을 골라잡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의 행동에 분개한 한카는 디누단마와 앙둔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세 나라는 국제 사회에 현 상황의 심각성과 불안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은이 무려 40여년 간 무력시위 외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자, 둔감해진 국제 사회는 당장에 큰일이 터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재개: 남극해 전쟁
합동군의 침공과 북진
최초의 무력시위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5064년 6월 15일 새벽, 은 장성연맹을 주축으로 한 장성연맹합동군의 신 함대가 한카 영해를 침범 및 해안도시 수 곳을 습격했다. 단, 흉내이리가 주요 병력으로 동원된 것은 저번과 마찬가지였으나 이번 침공은 오로지 한카만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그 이유야 한카만이 유일하게 무력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은의 관심이 한카로 쏠리자 티펠라트리아의 다른 국가들은 내심 안심하면서도, 겉으로는 한카에 대한 지지 표명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해당 문제에 대해 오래토록 함께 힘을 모아왔던 디누단마와 앙둔은 곧바로 합동군에 선전포고하고 지원군 파병과 물자 지원을 결정했다. 다만 디누단마는 인구가 너무나도 적은 소국인지라, 한카 측에서 파병을 거절하였다. 이에 디누단마는 몹시 아쉬워하면서도 뛰어난 기술력을 활용, 신무기를 비롯한 물자 지원만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한카와 앙둔이 연합군을 결성하고 진영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장성연맹합동군 대 한앙연합군의 구도가 완성되었다.
장성연맹합동군은 한카의 남부인 한하이 대교구 일대를 무서운 속도로 점령해갔다. 다행히도, 정부의 발빠른 대처 덕분에 주민들은 모두 북부의 키옹 대교구 쪽으로 피난해 있었다. 합동군의 북진에 한카 사회는 동요했다. 일전 공포의 새천년이 입힌 피해를 복구한 것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번 북진으로 인해 재건한 도시들이 금세 다시 황폐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의 마비 작전
그러나 실상은 다르게 흘러갔다. 5065년 3월 19일, 한카 교황의 요청으로 앙둔의 껴제모걀 수십 기가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아르토이트 징벌전쟁 이후 금지되었던 겸포 사용이 해제되었다. 공교롭게도 3월 19일은 앙둔의 건국기념일이기도 하여, 갑인 병사들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일반적인 갑인의 겸포도 위협적이지만, 껴제모걀 정도가 되면 백린탄에 견주는 효과와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황의 결정은 실로 과감한 것이었다. 연합군은 합동군의 북진 예상로를 미리 점거한 후 4월 1일에 작전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가를 비롯하여 교회·병원·학교 등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여, 모든 인프라가 붕괴 및 마비되었다.
그러나 마비 작전은 오히려 완전한 악수였다. 도시를 뒤덮고 있던 인공 구조물이 사라지자 흉내이리에게는 진격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HNS 무용론이 떠올랐고, 무엇보다도 이번 작전을 감행한 앙둔 제국이 HNS 창설의 주축이었다는 점에서 강도높은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합동군에서는 특별히 발이 빠른 몇 개체를 선출하여 선발대 역할을 맡겼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껴제모걀 몇몇이 습격당함으로써 전력에 손실을 입은 연합군은 일보후퇴하였고, 그 틈을 탄 합동군은 키옹 대교구의 경계선 가까이까지 진격했다. 개전한 지 정확히 1년 만인 6월 14일에 이르러, 한하이 대교구는 완전히 점령당하고 만 것이었다. 양 진영은 경계선 주변 일대에서 뒤치닥거리며 5065년을 마무리한다.
연합군의 회생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카와 앙둔이 고작 은과 흉내이리를 상대로 영 힘을 못쓰고 있자, 지켜보다 못한 란카헤와 이렘나가 합동군에 선전포고하고 병력 지원에 나섰다. 날짜는 각각 5066년 1월 17일, 동년 2월 4일이었다. 란카헤는 한카의 우방국인 동시에 국경까지 맞대고 있어 위협을 느끼기 충분한 조건이었고, 이렘나는 앙둔과 혈맹으로 평가될만큼 역사 깊은 형제 국가로써 이번에도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이다.
위치 상 란카헤에서는 곧바로 지원군을 파병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한카-란카헤 즉 한란군을 편성하여 키옹 대교구에 배치하고, 못해도 2주 간격으로 부대를 교대시키면서 한하이 대교구로 내보냈다. 이윽고 5월 8일 한란군은 디누단마의 신무기인 탱크로 합동군을 한하이 대교구에서 거진 몰아냈으며, 합동군의 일부 부대만이 한카 최서단 지역인 다이림 교구에 고립되었다.
이렘나의 경우에는 거리도 멀거니와 기술 상 문제로 파병에도 난항을 겪을 것이 우려되어, 2월 11일에 앙둔 본토에서 출발하는 추가 지원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은 마찬가지로 앙둔-이렘나 즉 철앙군을 편성하였다. 철앙군은 다이와와 구오 사이 일이무에잇 해협을 거쳐 탄디아 항로로 남하, 5월 21일에 은 장성연맹의 본토를 직접 타격했다. 그 결과로 은 역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의외의 복병
5066년 7월 10일, 의외의 국가가 예상치 못한 노선을 탄다. 세계 최강대국인 자소크가 장성연맹합동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경제적 제재 가능성이 생기자, 전사트 국가들은 은근한 압박을 느끼고 발을 빼기 시작했다. 한앙연합군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원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이림 교구에 고립되어 있던 합동군 일부 부대는 철수에 성공했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이토록 갑작스러운 자소크의 지원이 가능했던 데에는 흉내이리들의 공이 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메디아 라투키 반도에 상주하던 바다흉내이리들이 메티샤를 건너 자소크에 로비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모론이거니와, 자소크의 성향을 고려해보면 속아주기도 어려운 주장이다.
전세가 기우는 것을 느낀 한카 교회국에서는 심히 분통해 하면서도, 디누단마·란카헤·앙둔·이렘나 등 연합군 4개국에게도 철수를 권유했다. 전범은 명분이 부족한 선제타격을 감행한 합동군이므로 이에 대한 단죄는 피할 수 있을 것이나, 전쟁배상이라는 짐마저 우방국들에게 씌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각국은 몹시 고심하였으나, 결국 5066년 8월 1일 일제히 철수를 결정한다.
합동군의 승리
5067년 1월 3일, 2년 3개월에 걸친 남극해 전쟁이 장성연맹합동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기본적으로 합동군은 연합군에게 전쟁배상금이나 영토 할양 등 역사적으로도 으레 볼 수 있는 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수교 및 무역 · 환경 협약 마련 등 다소 엉뚱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연합군을 주도한 한카와 앙둔은 꼼짝없이 배상을 이행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벌써부터 각국의 내부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한카는 온건파와 강경파의 의견 차가 극에 달했으며, 앙둔의 곈할라 앙둔 용황은 급성 신경마비로 중태에 빠졌다. 당대 학자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 정세가 상당히 뒤집힐 것으로 보았다.
이후
5070년, 한카 교회국은 키옹 대교구를 단단히 봉쇄한다. 이미 모든 주민이 키옹 대교구로 피난해 모여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허나 이미 한카 교회국의 행정력은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으며, 파문된 이교도 및 정치범을 포함한 악질 범죄자 수십 명이 탈옥에 성공, 한하이 대교구로 향했다. 숨어있던 공화주의자들과 감화된 민간인들은 한하이 교구와 킴샨 교구에 이르는 지역에 아나이 공화국을 건국하였으며, 흉내이리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다이림 교구와 남극연구특별지역은 무주지가 되었다.
5075년, 한카 교회국이 그간 지니고 있었던 국제 사회에서의 위신을 하나 둘 내려놓았다. 우선 북메디아 세이안 왕국은 후견국을 잃었으며, 한카야마타이 권역의 맹주 자리를 둔 이권 다툼은 이제 대엔지 제국과 야마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서로 견제하게 되었다. 한카력을 받아들이는 등 한카 교회국과 형제 국가를 자처했던 칼라만다리 연방의 경우, 막상 이번 전쟁에서 도움을 일절 주지 않음에 따라 이들에 대한 신뢰도는 급하락하였고 결국 들끓는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교황은 칼라만다리 연방과 단교하였다.
5077년, 곈할라 앙둔이 10년 투병 끝에 사망하고 아들인 갼데 앙둔이 20대 켸피투로 즉위하였다. 그는 이미 무시 못할 수준의 고령이었던데다가 국가 운영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사트 전역에 걸쳐 있는 기피다네리르를 인접 국가들에게 매각 처분키로 결정했다. 이에 앙둔 제국은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의 타이틀을 잃고 쇠약해지기 시작했다.